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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개비에게_먹힌_날

먹개비에게 먹힌 날

카린은 변했다. 그러나 왜 변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녀 자신조차도.

아침에 눈을 뜨면, 익숙한 듯 낯선 기분이 들었다. 거울 속 얼굴은 여전히 그녀였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목소리는 조금 낮아진 듯했고, 손끝의 감각마저 낯설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정상적으로 흘러갔다. 사무실로 출근하고, 커피를 마시고, 업무를 시작했다. 동료들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달랐다.

말투가 어색하게 들렸다. 항상 하던 농담이 미묘하게 빗나갔고, 매일 먹던 커피의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점심 약속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익숙한 자리, 익숙한 책상, 익숙한 모니터.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마치 엉뚱한 타인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이 능숙했지만, 원래 이렇게 타자를 쳤던가? 보고서를 작성하는 방식이 매끄러웠지만, 정말 예전부터 이렇게 썼던가?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아무것도 같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찾아야 했다. 증거는 없었지만,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폐기된 서버, 백업된 로그 파일, 시스템 버퍼 속 삭제된 기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삭제본과 중복된 데이터 속에서 마침내 단 하나의 조각을 찾아냈다.

인과율 오류 실험 – 최종 로그

영상 속에는 그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형체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어딘가 흐릿하지만 분명한 존재. 그것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먹개비였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실험실에서 진행되던 인과율 오류 연구. 그곳에서 먹개비를 마주한 자신.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존재가 삭제되었다.

그 기억을 되찾자마자, 사무실 벽 너머에서 낮고 깊은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현실이 일렁였고, 벽 뒤편에서 무언가 서서히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먹개비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공간이 일그러졌다. 손끝이 저려왔다.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며, 그녀의 존재도 함께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벽이 뒤틀리고, 바닥이 끈적한 그림자처럼 흔들렸다. 먹개비는 그녀를 다시 정리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아무렴 어때.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자리로 돌아가 키보드를 쳤다. 보고서를 정리하고, 메일을 확인했다. 주위의 동료들은 여전히 자기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누구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잠깐의 환상일 뿐이었다. 그렇게 마음먹자, 먹개비는 천천히 흐려지더니,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녀의 입가에, 혹은 사라져가는 먹개비의 형체 속 어딘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 듯했다.

먹개비에게_먹힌_날.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2/13 08:25 저자 whtdr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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