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크리스
(주)신성의 본사에 비상이 걸렸다. 이사회는 비밀 채널을 총 동원해 우호적인 러너와 수호사들에게 비밀 임무를 의뢰하기 시작했고, 이 의뢰를 수행하는 이들에게 'Z'라는 상호식별코드가 발급되었다.
그런 사정으로 그날부터 러너 길드가 모인 빅 포레스트에서는 러너 길드들의 홀로그램 회의가 한창이었지만, 기업 테러를 일삼는 크리스는 반기업주의자로 낙인찍힌 탓에 레드 몽키즈 클럽의 의뢰 게시판은 조용하기만 했다.
크리스는 지금 홀로스크린 앞에 앉아 찌푸린 얼굴로 메시지함을 뒤지고 있었다. 최근 러너 커뮤니티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익명 게시판마다 수상한 의뢰들이 심심찮게 올라오는 가운데, 크리스만 쏙 빼놓고 뭔가 숨은 거래가 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신성이랑 관련 있는 건가?' 문득 떠오른 오래된 적수, 신성. 크리스는 공단계에서의 실패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때의 치욕이 아직도 뼈아팠다. 신성은 그에게 있어 피를 토하고서라도 넘어서야 할 벽이었다. 그런 와중에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마즈와 낯선 여자, 케이티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냐.”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의 주인공, 크리스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크리스, 이 친구가 아까 말한 케이티야. 인사해.” 마즈의 소개에 크리스의 인상이 구겨졌다. 손짓으로 케이티를 가까이 부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인데?” 케이티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노신사, 기묘한 영상, Z 표식, 끈질긴 추격까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크리스의 눈빛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절실한 호소에 크리스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흥미로운데.” 그 한마디가 모든 것에 대한 허락 같았다. 잔뜩 구겨져 있던 표정의 크리스가 갑자기 너무 밝은 미소를 짓는 바람에 케이티의 눈이 동그래졌다.
“비밀을 밝혀내자고.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의뢰주의 정체가 밝혀지면 빌딩을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거야. 내 전용 폭탄으로 말야. 그땐 너도 협조해야 해.”
뜬금없는 제안에 케이티는 당황했다. 폭탄이 뭔 소린지 터무니없었지만 아무튼 끄덕였다.
케이티의 미심쩍은 표정에 크리스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목걸이, 아니 케이티는 그게 심상을 담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봤다.
“이거 봐. 내가 직접 설계한 폭탄이야. 어때, 끝내주지?”
이미지 속에는 기괴한 형상의 폭탄이 빛나고 있었다. 빨간 막대 다발이 사방으로 뻗어 있는 가운데, 커다란 시계가 폭탄 중앙에 달려 있었다. 아날로그식 시계바늘이 위협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우습고도 섬뜩했다.
“헤헤, 멋지지? 옛것과 새것의 조화라고나 할까. 내 디자인의 정수야.”
으쓱거리는 크리스의 모습에, 케이티는 유치함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시계 폭탄이라…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게 실제로 존재하다니.”
“뻑더레스에서 얻은 기술이지. 내가 훔쳐왔어. 시계는 내 아이디어고.”
어린애같이 상기된 크리스에게 케이티가 진심 어린 찬사를 보냈다. 크리스는 으쓱했지만, 내심 그 말이 기분 좋은 듯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죠.”
“좋았어. 그럼 계약 성립이다. 자, 악수나 하지. 앞으로 잘 부탁해, 파트너.”
‘단단히 또라이’라는 마즈의 말 그대로였지만 크리스의 거침없는 태도에 케이티는 묘한 자극을 받았다. 세상을 향한 도전의식, 불의에 맞서 싸우려는 열정. 그건 잃어버렸던 낯선 감각이었다.
씩 미소를 짓는 크리스의 모습에, 케이티도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괴짜와 함께 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어쩐지 이 남자라면 믿어볼 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