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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티_1-4_원고

1-4 서민구

새우거리재생사에게서 빠져나온 케이티는 이내 서민구 아파트의 좁은 방 안에서 눈을 떴다. 새우거리가 접속자가 제한되어 있는 폐쇄 인공계인 탓에 케이티의 몸은 새우거리를 찾아오려는 누군가에게 임대될 것이다. 임대료가 얼마인지는 몰랐다. 그건 새우거리 상인회의 것이었으니까.

삐걱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현실의 무게가 그녀를 짓눌렀다. 접속을 끊었지만 폭력의 기억은 생생했다.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빽빽이 들어선 아파트 건물들이 하늘을 가렸다. 햇빛 한 줄기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유일한 위안은 이곳이 도시의 최외곽, 노마드들의 영역과 맞닿은 경계는 아니라는 거였다. 약 1km쯤 저 화려한 자본구에 가까운 위치였다. 서민구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노마드에 사는 그들보다는 낫다며 자조하곤 했다. 적어도 일정한 수입은 있으니까. 그 1km는 케이티와 이웃들의 자부심이었다. 버려진 삶에서 1km 떨어진 삶. 때론 유랑민들의 자유가 부러웠다. 그들은 이런 궁상맞은 틀에 얽매이지 않을 테니까.

욱신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케이티는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밑에서 진통제를 꺼내 입에 털어 넣고, 낡은 찬장 깊숙이 숨겨둔 컵라면을 꺼냈다. 광제 금화를 처분하고 받은 돈으로 산 것이었다. 뜨거운 물에 불려 연명하는 오얏보다는 사치스러운 식사였다.

광제 금화는 지금은 쓰지 않지만 어디선가에서는 무척 비싸다고 들었다. 노신사에게 광제 금화를 받았을 때 크게 기대했지만 상인회에 처분하고 받은 금액은 기대만큼 대단하진 않았다. 그래도 적지 않은 금액이라 밀린 월세와 잡비를 모두 내고, 이것저것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포트 안의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스름 저편, 자본구의 마천루가 번쩍이고 있었다. 그곳에선 복제기라는 기계가 흔하다고 했다. 정제된 흑공 용액만 있으면 원하는 대로 음식을 뚝딱 만들어낸다는 마법 같은 물건. 그것은 영화상 카드와 흑공의 만남으로 탄생한 혁명이었다. 정확한 상상력의 설계도인 영화상 카드에 흑공 용액을 결합하면, 원하는 물건을 국한 없이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신의 영역에 가까운 기술의 승리였다. '보석은 물론이고, 명품 가방까지도 순식간에 만들어낸대. 그런 삶은 나에겐 영원히 허락되지 않는 걸까… 이 거리의 사람들에겐 평생 무의미한 기계겠지. 더 노력하지 않은 내 잘못인걸까…'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 해도 이런 식으로 살 죄까진 없었다.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꿈틀거렸지만 고문 영상이 플래시처럼 터지며 케이티를 괴롭혔다.

최근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오래전 노마드근처의 어떤 클럽 공연에 간 적이 있었다. 친구의 끈질긴 졸라붙음에 못 이겨 따라갔던 곳이다. 그날 만난 덥수룩한 금발의 남자가 유독 따듯하게 대해줬던 게 기억났다. 하지만 그 기억도 이내 우울함으로 물들었다. 그 친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마드 구석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범죄였는지, 사고였는지, 아니면 자살이었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삶은 케이티에게서 좋은 것들을 앗아가기만 하는 것 같았다. 행복이라는 감정은 언제나 덧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마치 빛바랜 꿈처럼. 하지만 최근의 일들은 달랐다.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사건들이 무언가를 시사하는 듯했다.

케이티는 늘 돈에 쪼들렸고, 미래는 늘 막연하기만 했다. 게다가 노신사프로젝트 Z, 그들이 남긴 깊은 인상이 자꾸만 케이티의 뇌리를 맴돌았다. 미스터리한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듯한 그들과의 만남을 그냥 잊기에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심상치 않았다. 지금 아니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으리라는 예감. 익숙한 일상을 깨줄 한 줄의 금.

창밖을 응시하던 케이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힘없던 어깨를 폈다.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듯 섰다. 흔들리는 눈동자엔 작은 불씨가 이는 듯했다. 제발. 이 불씨를 옮겨붙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케이티_1-4_원고.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4/06/04 13:10 저자 whtdr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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