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가상의 몸, 진짜 고통
- 목차 : 케이티 오프닝북 리스트
문신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낡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넘기며 주변을 둘러본 뒤 튼튼한 손을 뻗어 케이티에게 영화상 카드를 건넸다. “이거 재생해.” 그의 목소리는 명령조였다. 남자의 팔뚝에는 푸른 깃발 모양의 문신이 선명했다. 러너들 사이에선 자신들만의 문양을 스티커처럼 새기는 게 유행이었지만, 그보다 케이티의 주의를 끈 건 깃발 위로 어렴풋이 보이는 'Z'라는 문자였다. 노신사가 언급했던 프로젝트 Z가 떠오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케이티는 불길한 예감에 바이러스 방어 기능이 있는 트랜스 장치를 장착했다. 영화상 카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피투성이 환자복,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들, 정체 모를 공포.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여 쏟아져 나왔다. 절규가 터져 나오려 했지만 목에서 나오는 건 앓는 소리뿐이었다.
고통의 한계에 다다른 순간, 남자의 손아귀가 케이티의 목을 짓눌렀다. 심상에서 겨우 빠져나온 케이티의 눈에 그의 형상이 들어찼다. 사나운 맹수를 방불케 하는 광기 어린 눈빛. “가만히 있으랬잖아, 이 계집애!” 비명도 지를 새 없이 주먹과 발길질이 쏟아졌다. 이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범주를 넘어선 폭력이었다. 현실이었다면 이미 숨이 끊어졌을 지경이었다. 문신 남자는 미친 듯 케이티를 때렸다. 자신의 광기를 쏟아내기라도 하듯. 그러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맥없이 케이티를 내팽개쳤다.
“이거 누군지 알아?” 남자는 즉석 프린트물을 흔들며 물었다. 어제 만난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케이티는 이 폭력과 심상이 자백을 위한 고문 도구임을 눈치챘다. 남다른 폭력적 고통이 목적을 가진 설계임을 드러냈다. 케이티는 그 와중에도 기억을 뒤져 평온한 심상을 끄집어내며 의식을 가다듬었다.
“아니요. 처음 봐요.” 케이티의 대답에 문신 남자는 케이티를 던져버리듯 놓고는 몇 백 바이트 어치의 칩을 대충 케이티의 몸 위에 던지며 투덜거리며 나갔다.
바닥에 널브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던 케이티의 눈에 남자가 구겨 던진 즉석 프린트물이 보였다. 노신사의 얼굴이 담긴 것이었다. 새우거리에도 종종 오는 로세아국 사람들이 디스플레이 대신 저런 인쇄지가 나오는 구식 첨단 기계를 사용했다. 그러고 보니 떠올리기도 싫은 그 고문 영상의 사람들도 로세아국 사람들이었던 것 같았다. 문신 남자는 로세아국 사람은 아니었지만 인공계에서 외모가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케이티 자신도 작은 체구의 동백국 여성이지만 여기서는 할머니가 쓰던 모습인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진 대령국 여성의 외모였다.
(주)신성, 고급 정장의 노신사, 수호사, 러너, 거기에 로세아국이라니. 인생이 갑자기 너무 혼란스러워졌다. 피멍이 들고 살갗이 터진 모습으로 케이티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 당한 폭력에 눈물이 날 법도 하건만, 이상하리만치 무감각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새우거리 자체가 질 나쁜 환락가였고 케이티처럼 접속기를 사용하지 않는 인공계 출입자들은 에고 부족 때문에 행동이 과격해지는 경향이 있지만 이런식의 폭력은 케이티로서도 처음이었다. 새우거리 인공계에서의 신체를 수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죽지만 않는다면. 아니, 드랍아웃만 당하지 않는다면. 케이티는 가볍게 신체를 초기화시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신체의 상처는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정신적 충격은 오래갈 것 같았다.
이 모든 폭력이 낯설지 않다. 새우거리에서 보내는 나날들, 고통의 크기만 다를 뿐 본질은 다르지 않다. 남다르게 전문적인 군사용 고문 영상 덕분에 케이티는 자신이 익숙한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했다. 그것이 삶의 전부인 듯했다. 노신사에게 받은 광제 금화를 바라보자 씁쓸함이 밀려왔다. 어제 케이티의 마음을 두근거리했던 그 금화도 지금 마음의 짐을 덜어주지 못했다. 모든 게 부질없어 보였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은 할머니처럼 비극적 종말은 원치 않는다.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되어 보고 싶다는, 위험한 충동 같은 게 꿈틀거렸지만 케이티는 자신도 모르게 한적한 낚시를 하는 황홀한 상상에 빠져들었다.